[BBC Korea]북한: 탈북민들에게 영어는 ‘생존의 문제’다

이윤녕, 김섭 | BBC 코리아 | 2020년 11월 7일





탈북민 영어 교육 실태 보고서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민 수는 현재 3만3523명에 달한다.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여러 어려움 중 하나가 영어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느끼는 영어의 장벽은 어느 정도일까.


2008년 한국으로 탈북한 유나 씨는 처음 한국 사회에 적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영어를 꼽았다. 뜻을 가늠할 수 없는 외래어는 물론, 영어 간판으로 도배된 한국의 길거리조차 그에게는 생소했다. 탈북 과정에서 중국을 거치지 않고 북한에서 바로 한국으로 넘어왔던 탓에 영어 간판은 더욱 낯설게만 느껴졌다.


"북한은 전기 사정이 안 좋아서 간판에 불이 안 들어와요. 번쩍번쩍하고 이런 건 없었죠. 그리고 북한에는 길거리에 '경외하는 김일성 수령님 만세', '김정일 장군님 만세' 이런 구호들만 있는데 여기는 전부 간판, 그것도 다 영어인 거예요. 그러니까 머리도 아프고 어지러워서 처음엔 길 자체를 나가기 무서웠어요. 이게 우리나라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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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가 너무 많은 것도 그에게는 불안한 일이었다. 분명 한국어인데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들을 보며 분단의 아픔과 긴 세월을 느꼈다고 했다. 아무리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고 나와도 사회에 나와서 체감하는 남북의 차이는 더욱 컸다고 전했다.


"심지어 외래어는 한국에서 제일 많이 쓰는 '스트레스'도 뭔지 몰랐어요. 고기 하나 시키려고 해도, 음식 하나 주문하려고 해도 영어 이름이 많아서 정말 아뜩했죠. 여기서 어떻게 살까 앞이 캄캄했어요."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대입과 취업을 결정지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북한에서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탈북민들에게 영어는 하나의 '장벽'이 되고 있다.



북한의 영어 교육: "전쟁 영어를 배웠어요"



탈북민들이 영어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남북한 교육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북한의 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지만 한국의 영어 교육과는 크게 다르다는 게 탈북민들의 전언이다.


탈북민들이 기억하는 북한의 영어 교육은 기초적인 것이었으며 일부는 '전쟁 영어'를 배웠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유나 씨는 북한에서 배웠던 영어 교육은 '전쟁 영어'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북한에서 외웠던 영어 문장을 그대로 암기해서 들려주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저희에게 꼭 가르쳐줬던 문장 중의 하나가 '우리는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참된 전사들이다' 이걸 영어로 말하는 거예요. 영어로 하면 "I am the soldier of our supreme leader Kim Jong-il.". 그 기억이 제일 많이 나요."


그는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에는 새로운 과학 시대을 열고 최첨단을 달리겠다는 목표로 영어 교육이 훨씬 더 발전됐다고 말했다. 특히, 북한의 특목고 같은 영어 학교들은 최근 영어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했다. 다만 북한에서 배우는 영어는 기본적으로 영국식 영어였다고 강조했다.


"저희한테 미국 영어는 절대 안 가르쳐 줍니다. 북한에게는 '미국놈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미국의 언어를 가르쳐준다' 이건 어떻게 보면 북한 입장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희한테는 영국식 발음을 가르쳐줬어요."


혜진 씨(가명)도 북한의 일반적인 영어 교육은 한국 학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주요 과목 중의 하나지만 주로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줬다고 회상했다.


"북한에서 영어 수업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가 있거든요. 중요한 과목 중의 하나이긴 한데 많은 걸 가르치진 않아요. 문장 구조라든지 'student', 'school', 'desk' 이런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주는데, 한국이랑 비교하면 여기선 초등학생들이 기본적으로 다 배우고 넘어가는 그런 단계라고 하더라고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한꿈학교에 다니고 있는 은지(가명)의 기억 속에 있는 북한의 영어 교육도 비슷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이름을 영어로 쓰는 것 또한 영어 교육에 포함됐다.


"알파벳을 알려줘요. 'ABC'부터 시작해서 알려주는데 자음, 모음 이런 거는 아니고요. 그냥 단어나 글씨체 쓰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북한 발음으로 '윈도우' 이렇게 써줘요. 칠판에다 '창문' 쓰고 '윈도우' 이렇게 쓰고 '책상'이면 '데스크' 이렇게 써준 다음에 그냥 따라 하는 거죠.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이름을 영어 알파벳으로 쓰는 법을 알려줬어요."


그는 학교에서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 수업을 한다는 건 북한의 부모 세대 혹은 조부모 세대에게는 반감이 드는 일이었다고도 전했다.


"2학년 때 영어 수업이 생겼다고 해서 되게 신기했어요. 북한에서 러시아어는 많이 하잖아요. 그러니까 저희 할머니가 왜 너희 학교는 러시아어를 안 배우고 영어를 배우냐고 뭐라고 했어요. 삼촌들은 다 러시아어를 했는데 너는 왜 갑자기 미국 놈 언어를 하냐고 하셨어요. 부모님도 미국 놈 언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 그냥 학교에서, 나라에서 넣으니까 해야 되나 보다 하셨어요."



남한으로 '전학'온 아이들


현재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탈북 학생은 2531명으로, 10년 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2019년 기준, 교육부). 하지만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아이들에게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일은 한국 사회 적응 시 가장 어려운 점으로 꼽힌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한꿈학교에서는 영어 교육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탈북 청소년의 학업 중단율은 2019년 기준으로 3% 수준이다. 2008년 당시 10.8%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일반 한국 학생 0.94%보다 3배 이상 높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탓에 탈북학생들의 학업중단율은 초등학교 1.4%, 중학교 3.2%, 고등학교 4.7% 등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많은 탈북 청소년들이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안학교 등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 중 하나도 이 같은 학업 문제 때문이다. 지난 2004년 개교한 한꿈학교는 이처럼 학업 결손을 겪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다. 현재 이 학교에는 탈북 여성의 자녀와 탈북 청소년 등 모두 32명이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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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꿈학교를 설립한 김성원 1대 교장은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과목 중 하나는 바로 '영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남한에 입국한 이래 가장 먼저 피부로 와닿는 어려움이 영어입니다. 대학 진학했을 때도 가장 큰 어려움이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이 거든요. 세 번째는 이 학생들이 취업했을 때 현장에서 영어를 사용해 유리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영어 교육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어 기초가 부족한 탈북 청소년들의 경우 일반 교육과정에서 영어를 배우기가 상당히 힘들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보통 알파벳과 파닉스는 유치원, 유아 교육에서 이뤄지고 그 이후로는 토익, 토플을 위한 그런 과정으로 전개되거든요. 따라서 이 학생들은 남한의 일반적인 교육 과정과 학원 체계에서 영어를 처음으로 배우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상황에 처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는 영어의 가장 기초부터 시작해서 토익, 토플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압축적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교육권 : 생존문제가 된 '영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탈북민이 많다 보니 이들을 돕기 위한 민간단체도 생겨났다. 2013년 3월 설립된 북한이탈주민 글로벌 교육센터(TNKR)는 기초가 부족한 탈북민에게 영어 교습을 무료로 지원하는 시민단체다. 영어 약자인 TNKR은 'Teach North Korean Refugees', 즉 '북한 난민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TNKR에서는 자원봉사를 통해 모집한 원어민 교사들이 탈북민들을 상대로 1:1 영어 수업을 진행한다



이곳에서는 자원봉사를 통해 모집한 원어민 교사들이 탈북민들을 상대로 1:1 영어 수업을 진행한다. 교육 배경이 다양한 탈북민 개개인에 맞춰 수업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은구 공동대표와 함께 이 단체를 설립한 케이시 라티그(Casey Lartigue) 공동대표는 예전에 한국에 머무는 동안 우연히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한 탈북민의 요청에 이 같은 일을 하게 됐다. 미국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평소 교육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자신의 소문을 듣고 영어를 배우러 몰려든 탈북민들을 위해 단체를 설립했다.


현재까지 탈북민 455명이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고, 1027명에 이르는 자원 봉사자들이 교사로 나섰다. 지금도 그의 책상에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기다리는 학생들의 이름이 웨이팅 리스트에 빼곡히 적혀있다.


그는 탈북민이 이처럼 영어 배우기에 열심인 이유는 '생존' 때문이라고 말했다.


"첫 번째는 학교 안에서의 생존이죠. 한국의 대학은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를 필요로 하잖아요.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영어에 매여있어요. 대학 졸업을 하더라도 취업을 하려면 영어는 또 장벽이 됩니다. 물론 탈북 학생들은 학업 중단율이 높아 대학 졸업까지도 쉽지 않죠. 먹고 살기 위한 취업 문턱에서 영어는 또 문제가 됩니다."


이곳에서 탈북민을 가르치는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는 앨리스 황(Alice Hwang)씨는 탈북민들에게 필요한 영어 교육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기초적인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어와 그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영어 사이에 간극이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초적인 것들이 필요하거든요. 저는 그들이 영어 단어를 읽을 수 있고,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도와줘요. 길을 걷다가 간판을 보고 뭔지 알 수 있는 그런 거요. 여기 와서 가르쳐 보니까 이들에게 필요한 건 그야말로 '생존 영어(survival English)'라는 걸 알게 됐어요."


케이시 대표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탈북민들에게 '영어'는 단순한 언어, 그 이상의 또 다른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영어는 자유를 상징해요. 영어의 장벽을 깨고 나면 다양한 기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그들에게 북한을 탈출하는 것이 첫 번째 전쟁이었다면 두 번째 전쟁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적응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도전 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죠."



더 넓은 세상을 꿈꾸다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탈북민들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영어를 통해 보다 넒은 세상을 볼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영어를 배우는 많은 탈북민들은 영어를 통해 보다 넓은 세상을 꿈꾼다



혜진 씨는 영어 공부에 매진해 추후에는 미국에서도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해야 되더라고요. 시험을 보고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은 제가 문화심리학에 관심이 많은데 미국 대학원에서 그쪽 공부를 하고 싶어요."


유나 씨 역시 영어를 통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외국 여행객들이 평양이나 개성, 이런 발전된 도시에서 영상을 찍어오기 때문에 거기에 많이 의지를 하거든요. 제가 북한에서 살았고 북한의 실정을 알기 때문에 진짜 북한을 그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영어를 공부해요. 현재 북한 주민들을 위한 얘기를 세계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역할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만 잘 살자고 여기 온 것 아니잖아요."




영상 촬영 및 편집: 양준서

기사 원문 : https://www.bbc.com/korean/features-50128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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