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한국은 어떻게 화교를 혐오해왔나 ‘137년의 기록’

화교 전문가 이정희 교수

근대 화교 활동 담은 책 출간

유언비어의 파괴적 위험 경고

“외국인 포용하면 결국 이득”



화교가 없는 나라-경계 밖에 선 한반도화교 137년의 기록

이정희 지음/동아시아·1만5000원


한반도 화교사-근대의 초석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경제사

이정희 지음/동아시아·2만8000원


누군가를 혐오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걸까. 올여름 제주도 예멘 난민들에게 쏟아진 온갖 유언비어와 배제의 언어가 남긴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중국 동포에 대한 혐오가 다시 횡행한다. 지난 14일 서울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피의자가 중국 동포라는 거짓 소문이 유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2012년 제주도 올레길 살인 사건과 의정부역 칼부림 사건처럼 잔혹한 범죄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일단 중국 동포인지를 캐묻는다.


약 90년 전인 일제강점기 때 조선에서 화교(중국 동포들도 국적이 중국으로, 화교에 포함된다)에 대한 혐오가 폭력으로 실체화해 거리를 휩쓴 일이 있었다. 1931년 중국 지린성에서 조선인 농민이 농사를 짓기 위해 수로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중국 관헌과 충돌한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인 사망자가 없었지만, 현지 일본영사관이 흘린 ‘조선인이 다수 살상됐다’는 거짓 정보를 <조선일보>가 호외로 발행해 조선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전국에서 화교에 대한 공격으로 200명이 사망했다.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화교가 없는 나라>의 저자 이정희 인천대 교수는 “우리가 일본에 재일한국인의 처우 개선을 요구할 때, 한국에 있는 화교들에겐 어떻게 해왔는지도 함께 돌아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최근 출간한 <화교가 없는 나라>에서 이 사건의 근저엔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조선인 노동자의 증오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시 화교는 노동자, 농민, 상인으로 조선에서 상당한 경제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화공은 싼 임금에 일을 성실히 잘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몰아내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박탈감에서 자라나는 혐오의 심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사하다.


“화교에 대한 대학살이 이뤄진 것도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중국 사람이 목욕탕에서 조선인을 잔인하게 죽였다더라’ 같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광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정확한 사실과 진실을 시민들과 공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24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는 20년간 화교를 연구해온 전문가다. 1999년 <영남일보> 기자 시절에 화교 차별 문제를 접한 이후 한반도의 화교를 연구해왔다. 2000년부터 15년 동안 일본 후쿠치야마 공립대학에서 가르치다, 2014년부터 인천대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개항과 일제강점기 시기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다룬 연구를 모은 학술서 <한반도 화교사>를 출간했다. 함께 낸 <화교가 없는 나라>는 이 책을 읽기 쉽게 간추린 대중용 저서다. “화교 문제는 외국인 문제의 원조다. 화교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역사적으로 외국인 차별을 반추하면 현재의 외국인 차별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화교가 없는 나라>에는 지난 137년간 한국인들과 근현대사의 부침을 함께한 화교들의 경제, 사회사가 담겨 있다. 이 책은 근대에 중화요리·이발·양복이라는, 주로 칼을 쓰는 ‘삼도업’(三刀業)과 채소 재배, 주물공장, 포목점 등에서 두각을 보인 화교들의 경제활동에 주목한다. 또 화교 건축 기능공들이 서구의 건축기술을 익혀 명동성당과 약현성당 등을 짓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하고, 항일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거나, 200명의 화교가 한국 육군 산하 정보부대에 소속돼 북파 공작원으로 활동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등장한다.


인천 차이나타운.

책 제목으로도 사용됐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가 정착하지 못한 나라’라는 말은 한국인의 배타성을 상징해왔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런 통념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실 한국에서 화교들이 작은 규모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전쟁과 단교 때문이다. 해방 직후 6만명이던 화교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2만명 이하로 줄었다. 한국전쟁에서 총을 겨눈 양국의 교류는 단절됐다. 사람과 물자가 오가지 못하게 되자 한국 화교의 숫자는 자연증가만 있을 뿐 2만명 안팎으로 40년 넘게 정체돼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국인 중국과의 독점적인 무역망을 형성해 수익을 내는 화교의 전통적 사업 모델은 불가능했다. 화교의 7~8할이 중화요리점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화교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현재 60만명에 이른다. 이들을 ‘신화교’라 부르는데, 3분의 2가 중국 동포, 3분의 1이 한족이다.


‘뙤놈’, ‘짱깨’, ‘짱꼴라’라는 오랜 혐오의 언어는 화교에 대한 냉대의 증거물이다.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의 외국인토지법을 1961년 다시 공표해 1999년 폐지될 때까지 화교를 포함한 외국인은 상업용 토지는 50평, 거주용 토지는 200평 이상 소유할 수 없게 했다. 화교는 장사가 잘 돼도 규모를 키우기 어려워,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형 중식당에 속속 밀려났다. 이 교수는 “내가 만난 화교들은 세금은 똑같이 내지만 아동수당 같은 각종 복지제도 바깥에 놓여 있는 처지에 대한 불만이 많다”고 전했다.


특히 1969년 일어난 아서원 사건은 화교들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였다. 아서원은 1907년 화교 서광빈씨가 서울의 중심가에 연 고급 중식당이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고, 김구, 이승만부터 김영삼, 김대중 등 유력 정치인들의 자취가 남은 역사적 장소다. 이곳을 1969년 서씨의 외동딸이 롯데 쪽에 팔아버렸다. 시가 5억원짜리 땅을 6천만원이란 헐값에 넘긴 것이다. 주주 26명 중 한 명으로 14%의 주식을 보유했던 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주주들은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아서원 부지는 1979년 개관한 소공동 롯데호텔의 주차장 자리다. 이 교수는 “아서원 주주 측의 패소는 한국에서 화교가 살아갈 희망을 빼앗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적었다.


세계의 두뇌들과 노동자들을 받아들여 부강해진 미국처럼, 화교와 같은 외국인들이 마음 편히 일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득이 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생각이다. “과거에 화교들이 뛰어난 기술로 한국의 다양한 분야에 기술을 전수해주고 발전시킨 것처럼,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갖춘 화교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면 한국은 더 나은 사회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글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7504.html#csidxee87a77d9152074ad1ece1a4caa4b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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